로마의 위대함은 평민국가 건설(정시구 교수)
본문
로마의 위대함: 평민 국가 건설
로마가 위대한 것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넓은 영토에, 2천 년 동안 지속된 강력한 대제국을 형성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로마의 대한 표면적 이해에 불과하다. 로마의 위대함은 ‘평민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다. 로마는 경쟁과 기회 균등의 ‘공정한 규칙’을 평민에 까지 개방하고 평민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국가 발전에 활용함으로써 위대한 로마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것이 로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기원전 753년 건국한 로마는 기원전 509년 에트루리아계 왕정을 끝내고 공화 정부(Res Public Roman)를 수립하면서 이후 2세기 동안 귀족과 평민 계급 간의 갈등으로 끊임없는 내분을 겪었다. 로마에서 ‘평민계급’은 당초 병역과 납세 의무를 지닌 피지배 계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재산권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노예와 구별되었다. 평민들은 당초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없었고, 군사 호민관을 제외한 어떤 종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귀족과의 혼인도 법적으로 금지된 신분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445년 카눌레이아 법이 제정되면서 귀족과 평민의 혼인은 인정받게 되었다.
로마 평민층 참정권 쟁취의 획기적 계기가 된 것은 성산(聖山) 사건이었다. 기원전 494년과 449년에 있었던 성산 사건은 로마의 평민이 귀족의 독점 정치에 반대하여 무장한 채, 로마 북동쪽에 있던 몬스사르케(Mons Sarcer: 성산이라는 뜻)에 진을 치고 로마와는 별도의 ‘새로운 도시’ 건설을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에 평민 호민관(護民官) 제도가 정책되었다.
평민들의 권리가 크게 신장된 것은 특히 기원전 390년에 있었던 켈트족 침입 이후의 일이다. 로마시를 7개월간 무법천지로 만든 켈트족은 금괴 30㎏을 받고 로마를 떠났으나, 로마는 이후 평민에게까지 주요 공직을 개방함으로써 귀족과 평민 간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켰다. 평민들은 로마 군대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으로, 이민족 및 이탈리아 내의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로마에서 평민들의 협조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66~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은 특히 평민에게도 집정관(counsul)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에 의해 평민층의 국정참여가 법적으로 최대한 인정되었다. 이로써 평등을 향한 로마 평민들의 오랜 기간에 걸친 신분 투쟁이 종결되었으며, 로마 대제국 건설의 사회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국가 사회 발전의 에너지원이 될 수 있는 주요 사회구성원을 ‘체제’ 바깥으로 내모는 사회에서는, 아들 소외된 잠재적 엘리트들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발전은커녕 사회적 갈등이 그치지 않게 된다. 사회적 갈등은 국가 사회의 발전을 정체시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체제 자체의 붕괴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재능 있는 평민 계급이 사회의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는 사다리를 열어 두어야 한다. 그것은 로마에서 비약적 국가 발전의 에너지가 되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기원전 1세기)에 이르러서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정치적인 면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평민의 국가가 되었다. 귀족 가운데는 스스로 평민의 양자로 들어간 뒤 평민으로 신분을 바꿀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마무리하자면 유럽 변방의 조그만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는 평민에까지 신분 상승의 기회를 폭넓게 개방함으로써 평민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세계 제국 건설에 활용했던 것이다. 2천 년도 전의 고대 국가 로마가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로마가 이와 같이 평민에게도 공정한 계층 상승 기회를 부여한 능력주의 사회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로마는 도덕적으로 타락함으로써 멸망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노예의 대명사로 꼽히는 로마 제국의 노예를 살펴보면 공화정~ 제국 초기 시기 노예들의 삶은 대체로 비참했다. 1세기 초기까지는 노예에 대한 로마인들의 인식은 같은 인간이라기 보단 '가축'에 가까웠다. 의외로 물건이 아닌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는데 세네카를 비롯한 소수의 철학자들 정도였다. 예컨대 트리말키오는 "운명에 짓눌려 살고 있긴 해도 노예들 역시 사람이며 우리와 같은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라고 했으며 노예 해방은 주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통념과는 달리 로마법 어디에도 노예를 물건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인에 비해 열등한 인간이었고 주인은 노예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해방노예마저도 노예를 학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우구스투스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 한 해방노예 출신의 재력가는 자신의 노예가 황제 앞에서 작은 실수를 하자 그를 곰치 연못에 빠트리려고 했는데, 황제의 만류로 간신히 살 수 있었다. 생사여탈권뿐만 아니라 폭행도 서슴지 않았으며 성폭행도 일삼았다. 만약 노예가 자신의 주인의 암살을 막지 못하면 그 집안의 노예들은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처형당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처형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결국 처형은 이루어졌다고 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칙령으로 주인이 노예를 죽인 경우에도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다고 했으나 이는 노예를 처벌할 정당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 한정되었다. 즉 주인이 노예를 죽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주인은 얼마든지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로마가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데서 기인한다. 심지어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다. 로마의 십이표법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3번 노예로 팔면 자식은 아버지의 지배권에서 해방된다."는 조항이 있다. 바꿔 말하면 3번씩이나 노예로 팔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노예의 처우는 조금씩 좋아지는데 AD 2세기에 쓰인 가이우스의 법학제요를 보면 노예에 대한 주인의 과도한 폭력은 금지되었고 만일 폭력에 그 정도가 심할 때에는 국가가 강제로 노예를 매각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이전까지 금지된 노예의 결혼과 재산보유가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등 전반적으로 노예의 직위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이조 조선도 철저한 신분제도 사회였다. 조선 백성의 70% 정도가 왕가와 양반의 종노릇을 하며 평민의 자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조선 500년이 지난 구한말에 이르러 중국의 소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라의 꼴은 언제 멸망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던 차에 일제의 침입을 받았던 것이다. 만약 조선이 로마처럼 평민의 에너지를 이용하였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그렇게 피의 탕감의 역사를 치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이종수. 『대한민국은 공정한가』. 도서출판 대영문화사. 2013.
https://namu.wiki/w/%EB%85%B8%EC%9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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