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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12-22 (20121016)"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우리가 되자" 황진수 교수님

작성일 12-10-22 00:00   /   조회 97,528

본문

오늘 여러분과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을 올려보지만 구체적인 목소리로 답해주신 적은 없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돌아가시기 전 자신이 일생 동안 하나님을 갈구했지만 하나님은 철저한 무응답으로 일관, 깊은 어둠의 고통 속에 자신이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생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일했던 분조차 하나님의 존재를 실체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사건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겁니다. 기도를 간절히 했는데 그 기도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아니면 실제로 어떤 영적인 신비로운 경험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이러한 단편적이고 심지어는 다소 우연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역사상 얼마나 많은 신적 경험의 고백이 단순한 오해로 판명된 경우가 많았습니까? 저는 오히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고백이 훨씬 진솔하게 다가옵니다. 참아버님은 하나님의 실존을 그 누구보다도 절박하신 심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 하신 분입니다. 신은 없다라고 하는 공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우리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려 하신 분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해보이시려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에 취해 사신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과 눈물의 한평생을 걸어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오셨습니까? 참아버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체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참아버님은 자신의 희생적인 참사랑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해 오셨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존을 자신의 삶 자체로 증명해 오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버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있는 걸 알아요? 하나님이 있는 것을 배웠어요? 배웠어요, 안 배웠어요? 「배웠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알아요? 「예」 어떻게 하나님이 있는 걸 알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있는 걸 아는 거예요? 「참부모를 보고요」 뭐 참부모를 보고? 그것은 대답이 아니예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어때요? 「그렇습니다」 내 머리가 부정 못 하고, 내 눈이 부정 못 하고, 내 코 등 내 오관이 부정 못 하는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 그렇게 알아요? 「예」 그러면 그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체험하는 것이 편안히 잠자고, 편안히 쉬고, 편안히 노는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거예요, 그저 죽자 살자 하는 어려운 곳에서 체험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거예요? 첫째 번이예요, 둘째 번이예요? 「둘째 번입니다」 맞았다구요. 신에 대한 체험을 느끼기 위해서는 인생 세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한계선상의 수난길을 극복하는 데서만이 가능하다구요. 그 결론이 어때요? 받아들일 만해요? 「예」 첫번째의 그러한 이유가 됐느냐 말이예요, 그게? 「예」 여러분들 그럼 체험을 했어요? 「예」 그래, 그러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은 손들어 봐요. 놀랍구만.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다니 놀랍구만. (130-209, 1984.1.22)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이 있는 걸 아는 거냐고 참아버님이 물었을 때 사람들은 ‘참부모를 보고요’라고 대답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참부모님을 증거로 내세우는 길 밖에는 없다고 말이죠. 하지만 참아버님은 놀랍게도 그것은 대답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참부모님을 보는 것만으로는 혹은 가리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내 오관이 부정 못하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 아니라 “한계선상의 수난길을 극복”하는 경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계선상이라하면 생과 사의 갈림길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수난길은 애닯은 복귀섭리의 길이겠지요. 복귀섭리의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참아버님의 말씀을 통해 이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효자가 되어 위로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피를 머금고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고문당하고 들어와서는 달 없는 밤에도 하늘을 위로하던 옛날의 생활을 잊지 않았어요. 고문을 받아 쓰러지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요, 숨이 끊어질락 말락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이 진리가 나오기까지는 여러분이 모르는 깊은 배후가 있고, 골짜기가 있고, 굴을 통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야! 레버런 문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이럴 수 있는 자리였다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구요.” (참부모님 생애노정) 칠사부활 팔단완성입니다. 원리강론에 따르면 재림주는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 하여도 초림때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참부모님을 세우시어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섭리는, 아담에서 예수님을 거치어 재림주님에 이르기까지 세번째인 재림 때에는 의당 그 섭리를 이루시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참아버님은 죽을 자리에서도 죽을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3년 공생애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단 한 번이었습니다. 부활도 단 한 번이었지요. 그야말로 짧고 굵은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참아버님은 예수님보다도 훨씬 더 불쌍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복귀 섭리의 사정에 따라 죽음의 길에서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돌아오시는 놀음을 형진님 말씀에 따르면 7번이나 반복하신 겁니다 (6번의 옥고와 헬기 추락사고). 즉, 7번 실체부활을 해오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을 참아버님은 7번 반복하셨다는 말입니다. 참아버님의 인생은 그야말로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서의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참아버님께서 본인의 육신을 돌보시지 않고 갖은 옥고를 치루시면서 죽음의 자리에 내몰리셨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어 참아버님을 살려오시는 역사를 해오신 겁니다. 이러한 내막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내리치려고 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이 막아 서실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참아버님의 사랑을 우리는 얼마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 전체를 다 감당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입니다. 참부모님이 가셨던 길은 우리가 마찬가지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놀라운 탕감의 은사로 참부모님이 걸으신 그 길보다 훨씬 편안한 길이 우리에게 놓여져 있지만 그 원칙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참부모님과 똑같이 복귀섭리의 생사의 갈림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타락이 없었다면 그 길의 모양새는 좀 달랐을 것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바라기 전에 내 속에 소망의 실체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정적이고 이념적이며 생명적인 그 기준까지 도달 하지 못한 것이 타락이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픔이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004-296, 1958.10.5.) 타락이 없었다면 우리의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귀와 재창조의 길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원칙은 같은 것입니다. 복귀섭리 원리는 (재)창조 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귀섭리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겪는 그 경험과 바라기 전에 내 속에 소망의 실체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타락이전의 하나님 경험의 방식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그 길이, 그 원칙과 내용이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경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생과 사를 초월하는 경험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과 사를 초월하는 그 경험이 무엇입니까? 그저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극기심, 혹은 인내심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참아버님의 생사의 고락에서 경험하셨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참사랑인 것입니다. 그저 구호적인 참사랑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상대를 위해 100% 다 내어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실체적 참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참아버님의 죽음의 위험 자리에 내려오셔서 참아버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절대복종하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 어떤 논리적 증명이나, 그 어떤 교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존재의 실체적 증명입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지식, 감정, 의지 모두를 합쳐도 다 담을 수 없는, 내 한 존재에 얽힌 하나님의 창조목적, 복귀섭리의 전 과정과 그 속에 담긴 하늘의 소망을 실체적으로 체율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 자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그 어떤 논리로 설명하려 한들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원리의 달인이 되어 달달 외운다고 해도 참아버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말 속에 다 담아낼 수 있습니까? 논리적 증명이나, 감정적 호소나, 그 어떤 의지적 선동도 그 사랑을 가리키는, 즉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 결정적 증명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서, 우리의 사위기대 관계 속에서 실체적으로 체율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 죽음을 왔다 갔다하는 경험을 해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실체적 기준은 이미 참부모님이 우리를 위해서 세워주셨습니다. 참부모님의 실체부활하신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기준과 동일한 방향성을 세웠다라고 하는 작은 조건을 세우면 됩니다. 참아버님의 실체부활 경험은 말 그대로 실체적인 것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여러 번 갔다 오신 겁니다. 그 실체적 기준 덕택에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방향성을 그 기준에 맞춘다고 하는 작은 조건만으로 그 실체성에 동참할 수 있는 은사를 입는 겁니다. 이러한 동참은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아, 내가 생사의 갈림길의 기준을 세워야지’ 하는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실체적인 관계의 형성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 하며, 나의 부모님과, 배우자와, 아들 딸과, 내 이웃들과 실체적인 사위기대 관계를 형성해야만 합니다. 모든 게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실적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실적의 가치란게 참부모님이 하나님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그 참사랑의 기준보다야 한참 낮겠지만, 방향성을 그 최고의 가치를 조준했다고 하는 조건을 세우고 더욱 더 열심히 사랑을 완성하겠다고 하는 다짐으로 하나님 경험의 깊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참사랑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참아버님은 절대적인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기반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절대적 기반이 원인이 되어 절대적 존재가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대적 기반은 다름 아닌 참사랑입니다. (219-127, 1991.8.29.) “하나님도 사랑 때문에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우주의 근본 원인은 참사랑의 근원으로 말미암아 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20-268, 1991.10.20.) 이러한 참사랑은 하나님보다도 더 근원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참사랑의 결과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보다도 먼저, 존재 이전에...” (180-126, 1988.8.22)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절대복종 할 수 있는 참사랑의 “대상 이상권”의 형성을 제일 목적으로 두셨읍니다. 이 말은 곧 창조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참사랑의 완성을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이 아니예요. 그 사랑이 제일이예요.” (180-126, 1988.8.22) 참사랑의 속성은 그 사랑의 대상에 절대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이상이요 최고의 가치입니다. 참사랑에 기반을 둔 하나님도 참사랑의 “대응적인 상대권을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란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은 “절대적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219-127, 1991.8.29)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 인격”으로 규정했을 때는 참사랑이 하나님의 존재보다 선행한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절대복종이란 무엇입니까? 절대복종의 순간은 생과 사의 갈림길입니다. 나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내 전부를 내어주는, 희생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죽고 상대를 살림으로써 전체를 살리는 놀음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참사랑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내 배우자를 하나님처럼 모셔야 된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대복종의 참사랑의 관계 속에 우리는 하나님조차 절대적으로 지향하는 참사랑의 운동에 공명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참사랑의 관계 속에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통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내가 절대복종하는 참사랑의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통해 존재함을 받은 존재들인데 그 존재의 원천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그 모든 시도가 얼마다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지를, 그 한계를 우리는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 어떤 훌륭한 논리도 논리 그 자체로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논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우리를 이성적으로 이끌 수 있는 한 방편을 마련해 주는 것뿐이지 그 자체로는 하나님 증명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증명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며, 그 경험은 우리의 지, 정, 의가 통합된, 아니 그 셋을 초월한 지점의 심정적 경험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참사랑의 경험인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반드시 우리는 도달해야 합니다. 그 말은 그런 자리를 점령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전체를 가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히 하나님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참부모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 기준에 도달했을 땐 우린 하나님의 존재를 더 이상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명한 진리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하여 생각하기 전에 그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바라기 전에 내 속에 소망의 실체로 임재하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내 앞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실체적으로 드러내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증명합시다. 우리의 관계를 통해 꼭 증명해 보이도록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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